📚매일 읽기 : 2022.3.1. ~ 4.18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아르놀트 하우저. 1983. 반성완, 백낙청, 염무웅 옮김. 2016. 창비)

 

책을 읽고 핵심 내용을 간추려 아카데미 올림피카 인스타그램(AcademyOlympica)에 올리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2022.3.1. ~ 4.18까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을 읽고 핵심내용을 발췌해 올린 것을 모두 모은 것입니다. 아카데미 올림피카의 인스타그램으로 가시면 그림과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총 네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속에서 우리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이해하는 것은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현대 문명의 뿌리를 발굴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환경문제를 문명사적으로 보고 싶은 분들, 예술, 문화 등에 모두 관심있는 분들이 읽기에 재미있고 유익하고 핵심이 잘 정리된 책입니다. 앞으로 2, 3, 4권도 꾸준히 올릴 예정입니다.

 

 

목차

 

제1장. 선사시대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4장. 중세

(1)-1
2022년 3월 1일. 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pp.102-105
 
 "… 크리티 예술의 특색으로서 '근대성'을 강조하는 학자도 많다. 그렇지만 이 점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애매한 문제가 아닐까 한다. ... 그들의 예술은 지속적이고 깊은 인상을 주기에는 너무도 안이하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기법을 쓰고 있다. ... 그들의 벽화는 현대의 호화여객선이나 실내수영장 주변의 장식용 그림들을 연상케 한다. ... 크리티 예술의 이러한 '근대성'은 아마 크리티에서 예술작품이 공장식으로 생산되고 방대한 규모의 수출을 위한 대량생산이 행해졌다는 사실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_예술의_사회사 #아르놀트_하우저 #크리티_예술
 

 
(1)-2
2022년 3월 1일. 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pp.110-123
 

 "호메로스의 전설은 시인에 관한 신화, 즉 시인은 반신이자 기적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예언자라는 신화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은 모두 이런 명예욕, 동시대 및 후세 사람들한테 칭송받고 싶다는 욕구에서 생겨난 것이다. ... 그들의 작품은 ... 종교적 의미를 상실함과 동시에 서정성도 잃어버리고 서사시적으로 되었는데, 이 '서사시'야말로 유럽 문학에서 종교의례와 관계없는 세속적인 것 중에는 우리가 알기로 가장 오래된 문학이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 르뽀, 즉 전쟁 중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을 연대기풍으로 서술한 데서 비롯, ..."
 
"그리스의 '민중서사시'란 낭만파 문학 연구에서 지어낸 말일 뿐이다. 호메로스의 시는 '민중적' 혹은 '대중적'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어느 개인의 창작이 아니요, 그렇다고 민속문학의 산물도 아닌 익명의 고급 예술품이며, 다수의 우아한 궁정시인과 학식 있는 문사들이 이룩한 집단창작으로서 그 창작과정에서 어떤 특정 개인이나 유파 또는 세대의 기여를 분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19세기 미학 전체의 주춧돌이 되는 앙만주의 예술관 및 예술사관은 완전히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다. ... 그렇다고 신비를 잃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낭만주의자들은 ... '소박한 민중문학'이라 불렀고, 우리는 ... 시적 창조력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농민의 생활권에 자리 잡고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인 성격을 띤 최초의 문학은 헤시오도스의 작품이다. ... 그의 작품에서 다루는 소재와 가치관, 인생목표 등은 농민층, 즉 지주귀족들에게 억압받는 민중의 그것이었다. 헤시오도스 작품의 세계사적 의의는 그것이 사회적 긴장과 계급 간 대립의 최초의 문학적 표현이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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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년 3월 2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133-150.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02.아케이즘과 참주제하의 예술" 중에서.
 

도시적인 생활양식과 상업이 발달하고 경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되면서 ...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 이오니아와 그리스 본토에서는 적어도 자유시민들 사이에는 경제적인 경쟁의 자유가 있었다.

 
경제적 개인주의가 대두하면서 서사시 편찬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
 
이딸리아 체르베떼리에서 출토된 아리스토노토스의 서명이 있는 크라테르, 기원전 7세기경. 현존하는 예술작품 중 작자의 서명이 담긴 가장 오래된 것. 예술에서 개인주의와 주관주의가 발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예술이념과 마주친다. 이제 예술은 이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 정신의 발현인 예술형식은 그 최초의 실제적 사명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과 경향, 즉 애초의 목적에서 떠나 자율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가능성과 경향을 지니고 있다. ...
 
그리스 이전에는 순수인식, 이론적 탐구, 합리주의적 학문 등이 없었듯이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의미의 예술, 즉 항시 순수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즐길 수 있는 예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즉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순수한 탐구로서 학문의 이념을 발견하던 바로 그 무렵, 그리스인들은 예술 분야에서도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은,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최초 징조라고 할 수 있는 순수예술 작품들을 처음으로 내놓았다. ...
 
갖가지 형식의 자율화라는 결과를 낳은 추상적 사고능력 발달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요인으로는 식민활동이라는 특수사정에 얽힌 여러 경험 이외에 화폐경제의 실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교환수단의 추상적 성격, 온갖 물품이 화폐라는 공통분모로 표시되는 현상, ...
 
상이한 내용을 담은 동일한 형식이라든가 반대로 동일한 내용을 담은 각기 다른 형식을 상정하는 능력 ... 내용과 형식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 내용과 형식을 각기 별개로 생각하고 형식을 하나의 독립적인 원리로 보는 단계도 멀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이 유감없이 활용되기 위해서는 화폐경제에 의한 부의 축적과 직업의 분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 지배계급이 '목적 없는' 예술이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술이 주술과 종교, 과학과 실용행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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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22년 3월 3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150-157.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03.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중에서.
 
🍏 고전주의, 귀족제, 민주제
 
고전주의 시대의 아테네 민주제는 그렇게 철저히 민주적인 것이 못 되었고 민주정치 시대의 아테네 고전주의도 언뜻 생각하는 만큼 엄격하게 '고전주의적'이지도 않았음이 판명된다. 예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기원전 5세기라는 시대는 오히려 자연주의가 가장 중요하고 풍성한 수확을 올린 시기의 하나라고 보는 것이 좋다. ...
 
시인과 철학자 들이 공감한 대상은 돈 많은 시민층도 돈 없는 시민층도 아니었다. ... 기원전 4, 5세기의 주요한 철학자와 시인은, 소피스트들과 에루리피데스를 예외로 하면 모두가 귀족제와 반동 측에 서 있었다. .... 희극이라는 것 자체가 민주적인 문학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반동적인 성향을 띠었다. ...
 
이러한 보수적 경향이 자연주의로의 진전을 지연시키기는 했지만 전면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 당시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진보적 정치와 자연주의의 연관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형식 존중과 보수주의의 관계를 얼마나 필연적인 것으로 느끼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
 
고전양식을 '이상주의'라고 부르고 고전주의 예술을 "있어야 할 더욱 좋은 세계"와 '이상적 인간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사고방식은 이 시대에 지배적이던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 비극
 
비극이야말로 아테네 민주제의 특색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는 예술이다.아테네 민주제의 사회구조가 내포하는 갖가지 모순을 이만큼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한 예술장르는 없을 것이다. 비극은 그 외적 형식 즉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었지만, 그 내용 즉 소재가 된 영웅전설과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
 
공연작품을 선정하는 권한은 모두 공연 준비를 책임진 부유한 시민들에게 있었고, 수상작 결정은 시 참사회의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으며 판단을 내리는 데 무엇보다도 정치적 배려를 우선시하는 심사위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일반 시민은 입장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었던 데다 도리어 극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보상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민주주의의 최고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나, 실은 이것이야말로 일반 대중이 연극의 운명에 대해 발언할 길을 처음부터 막아버린 요인이었다.
 
입장료로 받는 소액 단위 수입에 의존하는 극장만이 진정한 의미의 '민중극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극장은 민중극장의 원형이었고 당시의 관중이야말로 전국민을 한덩어리로 하는 예술공동체의 이상이라고 보는 후대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사고방식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민주제 시대 아테네의 축제극장은 결코 '민중극장'이 아니었다.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 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극장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종의 교양기관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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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022년 3월 4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157-167.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03.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중에서.
 
🍏 미무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중연극은 미무스(mimus, 실생활에서 취재하고 주로 흉내와 춤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광대극 혹은 그 배우)였다.
 
미무스는 국가로부터 어떠한 지원금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부의 어떠한 지시도 따를 필요가 없었고 ... 단지 관중을 즐겁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 다만 그 작품들은 오늘날 거의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미무스는 비극보다 훨씬 오래된 정도가 아니라 그 기원이 아마도 태곳적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으로, ... 주술적 의미를 가진 흉내내기 춤과 합창, 풍작을 비는 의식, 짐승을 잘 맞히는 마술 및 사자숭배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 선전기관으로서의 극장
 
축제극장은 도시국가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선전시설이었다. ...
 
시키온의 참주 클레이스테네스가 디오니소스 숭배를 정식으로 인정한 것은 귀족계급 사이에서 행해지던 옛 영웅 아드라스토스 숭배를 밀어내기 위한 정치적 책략이었고, ...
 
하지만 이들 참주가 시작한 종교제도와 ... 종교개혁은 민중 속에 감돌고 있던 순수한 종교감정과 종교적 요구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성공을 거둔 이유 중의 하나도 이런 민중의 감정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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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2년 3월 4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168-184.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04.그리스의 계몽사조" 중에서.
 
🍏 소피스트들의 교양이상
 
기원전 5세시가 끝나가면서 예술에서 자연주의적, 개인주의적 요소, 주관적-감정적 요소들이 점점 그 범위와 비중을 더해갔다. ...
 
철학에서 이 발전에 대응하는 것은 소피스트 철학이 불러일으킨 정신혁명으로서, ... 이 운동은 ... 화폐경제와 도시 시민층이라는 사회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는데, ... 신체의 비합리적 속성들을 계발하는 대신 의식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나며 언변 좋은 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교육의 기초를 세웠다.
 
지식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설정된 것은 인류사상 처음이었다. ... 소피스트들은 ... '덕'은 후천적으로 계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기인식, 자제력, 비판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양 문화이념은 바로 소피스트들의 이러한 교양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 에우리피데스
 
소피스트 철학의 사고방식의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예술적 표현은 그리스 계몽사조가 낳은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다. ...
 
에우리피데스 희곡작법의 핵심을 이루는 심리적 자연주의는 비극적-영웅적인 생활감정에 치명적 타격을 준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가 작품 속에서 논의되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적인 외경감을 덜하게 한다. ... 에우리피데스에 와서야 비로소 인간의 주체적인 입장이 논의되고, 과연 죄가 있는지 없는지 권리나 책임 같은 것을 가지고 따지게 된다.
 
🍏 플라톤과 당대 예술
 
기원전 4세기의 이러한 정신적 상황이 얼마나 복잡했는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플라톤이다. ... 그리스 문학의 대표자 가운데서도 플라톤만큼 전적으로 귀족문화를 옹호하고 나선 예는 드물 것이다. ...
 
그의 이데아론은 정치적 보수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는 고전적이며, 모든 반동적 관념론의 원형이다. 시간을 초월한 이념, 절대적 가치, 순수가치 등의 세계를 경험과 실생활 세계에서 격리하려는 관념주의 철학은 모두 단순한 명상의 선으로 물러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현실을 개조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 수해한 사회적 역할은 18 19 두 세기 동안의 독일 관념론의 그것과 흡사하다. 즉 그것은 실재론과 상대주의를 반박함으로써 반동세력에 더없이 유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예술을 과대평가하여 미적 가치를 근거로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 미적 기준으로 삶의 문제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반예술적 태도는 이러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비로소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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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22년 3월 7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185-193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05.헬레니즘 시대" 중에서.
 
헬레니즘 시대, 즉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56-323) 대왕 이후 200년 동안에 예술사의 중점은 확실히 그리스에서 동쪽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그리스와 동방 사이의 영향관계는 상호적인 것이어서 ...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인 혼합 문화를 찾아보게 된다.
 
이 개별 민족문화의 평준화 현상이야말로 헬레니즘 문화가 지니는 두드러지게 근대적인 성격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 서방과 동방, 그리스와 미개민족들 사이에 그때까지 너무나 명료하게 존재하던 경계선이 지워졌을 뿐 아니라, 계급과 계급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계층들 사이의 경계선도 많이 흐려졌다. ...
 
...비로소 세습군주제가 종말을 고한 이래 신분차별 철폐를 향해 나아온 일련의 발전과정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방향으로 결정적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신분이나 출생과는 관계없는, ... 완전히 새로운 '아레테' 개념을 전개한 것이다. ...
 
헬레니즘 시대가 되면 예로부터 내려오던 도시국가에 대한 충성심 대신 전체 교양계층을 망라하는 새로운 연대감이 생겨났다. 이 공동체의식은 ... 학자간 협력, 연구과제 분담, 연구성과의 통합 등으로 나타나 오로지 업적을 목적으로 하는 합리주의적 연구방법을 가능케 함으로써 ....
 
학문연구가 이렇게 전문화되고 비인격화된 것의 필연적 결과는 오로지 지식의 축적만을 중시하는 풍조와 절충주의의 위험이었다. 이 두가지 특색은 서양문화사에서 처음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했으며, ... 이런 경향은 예술작품 수집과 박물관 설립을 통해 더욱더 심화되었던 것이다. 계통적이고 계획적으로 수집하게 된 것은 헬레니즘 시대부터다.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주의' '바로끄' '로꼬꼬' '고전주의' 풍의 양식들은 물론 역사적으로는 서로 시차를 두고 발생했지만 일단 생겨난 뒤에는 동시에 병존했으며, ... 중산층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확고한 예술품 구매층으로 새로 등장했다 ...
 
문학에서 이 시대의 고도로 발달한 초상예술에 대응하는 장르는 ... 전기와 자서전이었다. 심리적 통찰력이 경제생활에서 경쟁에 필수적인 무기가 되자, '인간적인 기록'이 갖는 가치는 한층 더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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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2022년 3월 8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185-204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06.제정시대와 고대 후기" 중에서.
 
헬레니즘 예술의 시대에 뒤이어 로마 예술의 세계지배 시대가 시작된다. ... 제정하 로마는 제국의 통일적 통치체제와 더불어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제국예술'을 만들어냈고, 이 '제국예술'은 ... 도처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예술분야에서도 민중적 정신과 지방정신이 갈수록 힘을 얻어 고전주의 시대의 갖가지 이상을 몰아내게 되었다. ... 이러한 발전은 특히 초상조각에서, 그동안에도 로마 주택의 현관에 모셔놓은 선조의 상이라는 형태로 이어져오던 ... 이딸리아의 토착적 전통과 결합하게 되었다. ...
 
그리스 초상예술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리스인들이 공적 기념비로 쓰기 위한 것 외에는 거의 초상조각을 만들지 않은 반면 로마에서는 그것이 대부분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예술에서 조각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회화가 점차로 세력을 뻗기 시작하여 마침내 건축조각과 기념비 조각을 거의 전부 대체하다시피 하게 된다. 3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조각의 복제품 제조는 중지되고, 그뒤 200년 동안은 거의 실내장식을 회화가 거의 독접해버렸다.
 
로마시대 후기와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 어떤 빵집 주인은 자기가 하는 장사의 광경을 세세하게 돌에 새기게 했다. 당시는 그림이 전부였다. ... <트라야누스의 기둥>을 나선형으로 감아 올라간 부조처럼 '두루마리 그림책'의 일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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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22년 3월 8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04-213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 07.고대 그리스-로마의 시인과 조형예술가" 중에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를 통해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눈에 띌 정도로는 변하지 않은 것이 단 하나 있다. 조형예술가를 판단하는 기준, ... 조형예술가는 비천한 장인의 위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돈만 주면 그만인 부류로 여겨졌다. ...

 
시인은 경제적 의존상태가 가장 심했던 시대에도 자기에게 의식을 제공해주는 사람에게 손님으로 통했다 ... (이런) 풍조는, 정치, 전쟁, 스포츠 등 상류층 본연의 일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에 비해 이런 행위가 아무래도 예속, 봉사, 복종을 상기시키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
 
육체노동에 대한 경멸과 예배수단이자 선전도구로서의 예술에 대한 존중이라는 내적 모순에 직면한 고대인들은 예술가 개인과 작품을 분리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았다. 즉 작자는 경멸하면서 그가 만든 작품은 존중하는 것이다. ...
 
플라톤이 보기에는 전문화라든가 일정한 틀에 박힌 모든 활동은 속된 것이었는데, 이 '속됨'이야말로 민주제 사회이 특색의 하나인 것이다. ...
 
그리스에서는 귀족계급뿐 아니라 시민계급까지 노동을 경멸했는데, ... 귀족계급의 체면의식을 흉내내는 대신 오히려 직업은 신성하다는 자기들의 생각을 귀족계급에도 불어넣은 중세 시민계급과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에서 조형예술가의 생활조건이 눈에 띄게 변한 것은 대왕을 위해 행해진 선전활동과 직결된다. ... 알렉산드로스 후계자들 궁정의 미술품 수요는 개인의 손에 부가 축적됨으로써 생겨난 수요와 함께 미술품 소비를 증대했고, 그 결과 미술품의 가치가 올라가고 조형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었다. ...
 
슈바이처가 '조형예술적 천재의 발견'이라 부른 요인이 있는데, 그 기원은 플로티노스(205?-70)의 철학으로 거tmf러 올라간다.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미는 신의 본질적 특색의 하나이고 개개의 단편적 현실은 미를 통해서만, 그리고 예술의 형태로만 신과 멀어짐으로써 잃어버렸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제 예술가는 다시 선사시대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내지는 신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서 후광이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문학과_예술의_사회사 #아르놀트_하우저 #Arnold_Hauser #The_Social_History_of_Art 
 
 

 
(7)
2022년 3월 9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17-230
 
"제4장.중세 - 01.초기 기독교 예술의 정신주의" 중에서.
 
중세를 하나의 통일적인 역사시대로 보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덕인 성격을 띤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

 
일반적으로 중세예술의 특색이라 불리는 ... 단순화와 양식화 경향, 공간적 깊이와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와 기능을 무시한 자의적인 취급 등은 중세 초기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도시적 화폐경제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세 예술과 문화의 근본적인 특색으로서 일관된 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다. ...
 
중세의 특색인 초월적 세계관이 기독교가 발생한 당초부터 확고부동했던 것은 아니다. ... 고대 그리스-로마 말기와 초기 기독교 예술의 형식이 지닌 표현성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적인 것이다. ...
 
고전기 그리스-로마의 사실주의에서 멀어져간 기독교 예술은 두 방향을 취하게 된다. 하나는 상징주의 방향, ... 또 하나의 방향은 정경이나 동작 또는 일화적인 사건 등을 ... 재현하는 ... 서사시적, 설명적 양식이다. ...
 
초기 기독교 예술은 적어도 시작 단계에서는 단순한 민중예술로서, ... 그림이야기를 연상시켜준다. ...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흔히 현실의 의도적 단순화라거나 ... 이상화 내지 고차원화라고 칭찬받는 대부분의 것은 능력 부족과 기술의 빈곤 때문에 대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의 재현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며, 초보적인 서툰 스케치 솜씨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 기독교 예술이 그 서툰 솜씨를 극복한 것은 밀라노칙령(313년)이 발포되어 이 예술이 국가와 궁정, 그리고 상류사회와 교양계층의 정통적인 예술이 된 이후의 일이다. ...
 
새로운 기독교적 생활이상에 따라 먼저 변한 것은 예술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었다. 그리스-로마 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미학적인 것이었는데, 기독교에서 예술작품의 가치는 미학 외적인 것이 되었다. ...
 
기독교 예술관의 가장 현저한 특색은 예술을 도덕교육의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이었다. ... 예술형식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서로마제국의 붕괴와 때를 같이 하는 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로마시대 후기의 표현주의는 이때에 비로소 '초월적 표현양식'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이제 예술은 현실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 
 
싼따마리아마조레 성당의 본당 모자이끄에서 .... 인물은 각기 고립된 상태로 그려져 있으며 인물 상호 간의 관계는 순전히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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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22년 3월 11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30-242
 
"제4장.중세 - 02.비잔띤제국의 황제교황주의 체제하의 예술양식" 중에서.
 
그리스계의 동방지역에서는 민족대이동 시대에도 문화단절이 일어나지 않았다. ... 꼰스딴띠노뽈리스의 인구는 5세기에 이미 100만명을 넘엇고 ... 중세를 통해서 비잔띠움(동로마제국 시대에는 꼰스딴띠노뽈리스로 불림)은 ... 전세계에 대해 우아함과 장려함의 모범이었다.
 
이러한 호화로운 생활의 경제적 지주가 된 것은 상업과 교역이었다. ... 여기서는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천하다고 생각하는 서방의 사고방식은 이해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궁정자체가 여러가지 사업을 독점해서 ... 거대기업체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중앙집권의 지극히 엄중힌 감시와 통제에 굴복했다. ... 황제의 권력기반이 된 것은 용병으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와 능력적인 관료기구였는데, ... 
 
상업과 교역, 도시경제와 화폐경제에 수반된다고 생각하는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반전통주의 경향이 비잔띤제국에서 꽃피지 못한 원인도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국 내의 어떤 지방에 토지를 소유하려는 사람은 꼰스딴띠노뽈리스에도 집을 한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법률이 나온 결과 지주들이 수도에 모여들었고, ... 황제에 대해 충성심이 서방제국의 귀족보다 열렬한 독자적인 도시귀족이 생겨났다.
 
비잔띤 제국의 통치형태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즉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한 사람의 전제군주의 손에 집중되는 형태였다.
 
... 독재권력을 확립하고 ... 절대복종을 요구했던 동로마제국 황제의 전체체제는 인민의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스스로를 전시하고, 위엄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감싸며, 신비적인 의식의 그늘에 숨을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만큼 예술이 왕만을 위한 예술이고 전귀족을 위한 예술이 아니었던 예는 아마 없을 것이고, 또 예술이 이만큼 철저히 종교적, 정치적 충성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일관한 예도 없을 것이다.
 
예술적인 목적은 동서가 모두 같았다. 즉 절대적 권위, 초인적 위대함, 신비적 위엄 등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된 방법은 옛날 고대 오리엔트 예술에서처럼 여기에서도 무엇보다 정면성의 법칙이었다.
 
여기에 그려진 인물들은 추호의 변경도 허용되지 않는 의례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대열을 흩뜨리기는커녕 조금이라도 한눈을 파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싼비딸레(San Vitale) 성당의 봉헌 모자이끄들은 이러한 '삶의 의식화'를 보여주는 모범이며, ...
 
비잔띤 건축은 초기 기독교의 이 바실리까 형식에다가 돔을 덧붙임으로써 건축물 내부의 갖가지 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이런 '비민주적인' 공간구성을 ... 전진시킨 결과가 되었다.
 
미니아뛰르 회화는 ... 두 종류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우아한 양식을 가진 헬레니즘 시대의 필사본을 따른, 한면 전체를 메우는 호화스러운 대형 미니아뛰르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원에서 사용된 책들에 그려진 좀더 소박한 것들인데, ...
 
미니아뛰르는 그다지 돈이 드는 예술이 아니었으므로 ... 사회적 지위가 낮고 예술에 관해 좀더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도 교객이 될 수 있었다. ... 미니아뛰르가 그려진 수도원의 서실들이 우상파괴 시대를 통해 정통파 예술과 대중예술의 피난처가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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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022년 3월 15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42-249
 
"제4장.중세 - 03.우상파괴운동의 원인과 결과" 중에서.
 
6~8세기에 걸친 일련의 소모적인 전쟁은 군대를 계속 보충해나가기 위해 지주계급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지주계급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지고 동방에서도 일종의 봉건제도가 발생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인, 아바르인, 슬라브인, 아랍인 등을 상대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전쟁을 계속하고 있던 황제들의 제일 목표는 군대의 유지였고, 이 지상명령 앞에서 일체의 다른 고려는 포기해야만 했다. 우상숭배 금지도 이런 전시조치의 하나였다.
 
우상파괴운동(iconoclasm)은 실제로는 예술배척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 일반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예술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 반예술적 경향 자체는 이 운동의 동기들 가운데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어쩌면 가장 덜 중요한 하나의 저류에 지나지 않았다.
 
우상숭배 금지령을 처음 내린 동로마 황제 레오 3세(717~41)...에게는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일보다 우상숭배를 금지함으로써 자신이 얻으리라고 기대했던 계몽적 효과가 훨씬 더 중요했다. 그리고 계몽이라는 목적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우상숭배 금지가 상층 교양계층에 미치는 영향으로, 그는 이 금지령으로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계층 사람들 사이에는 ... 교회의 모든 성상체계와 그 '이교도적' 의식 및 제도로서의 성직자층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높아지고 있었다. ... 우상파괴운동 전파를 강력히 촉진한 또 하나의 요인은 일체의 성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랍인들이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 ... 많은 사람들은 ... 자기들도 그들을 본뜸으로써 아랍인들의 비결을 체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상파괴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기는 황제들과 그 추종자들이 부단히 커져가던 수도원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데 있다. ... 수도원이 간직한 최대의 매력이 기적을 이룩하는 성상들이었다. 유명한 성상만 하나 가지면 그 수도원은 무궁무진한 재물과 명예의 원천이 되었다.
 
레오3세는 강력한 군사국가를 건설하려는 자기의 의도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교회와 수도원이라고 생각했다. ... 특히 수도원 생활이 일반 민중의 동경의 대상이된 결과 군대생활과 군대 외에 공무나 농업에 종사해야 할 많은 장정을 수도원이 가로채고, 또 끊임없이 헌납과 기증을 받음으로써 국가 재정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우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예술활동이 중단되었다기보다 단지 그 방향이 새로이 조정되었을 뿐이다. ... 지극히 형식주의적이 되고 ... 반복을 거듭하던 예술품 제작에 오히려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준 느낌마저 있었다. ... 교회의 요구를 고려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자연에서 취한 제재를 ...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 9~10세기에 걸친 비잔띤 예술 제2의 전성기도 우상파괴운동의 결과의 하나로 보는 주장은 옳은 것이다.
 
물론 비잔띤 예술의 형식은 머지않아 다시 정형화되고 만다. 그러나 이번에 이 보수적 경향의 모태는 궁정이 아니라 ... 수도원이었다. 한때는 궁정이 ... 불변의 통일적 규범을 수립하고자 했는데, 이제는 수도원 예술이 그와 같은 일을 시도 ... 수도사들의 정통성이 우상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그들은 보수적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런 보수성은 과연 철저해서 그리스정교 수도원의 성상제작법은 17세기에 이르러서도 11세기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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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2년 3월 17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49-271
 
"제4장.중세 - 04.민족대이동기에서 카롤링커 왕조(751-987)의 문예부흥기까지" 중에서
 
민족대이동 시대 미술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 비해 오히려 낙후한 것으로서 양식사적으로 아직 철기시대 단계에 있었다. 비잔띤 예술과 민족대이동기 서구의 예술, 이 둘처럼 대립적인 예술관이 이만큼 근접한 지역에서 동시에 존재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 게르만족과 켈트족이 점령하고 있던 서방에서는 장식적인 것에 철저히 얽매인 추상적인 기하학적 양식이 전개되고 있었다. ... 발전사적으로 보면 라뗀(La Tène) 문화 시대에서 한발짝도 나아와 있지 않다. 이 미술이 유치한 인상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인체묘사가 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민족대이동 시대의 예술은 ... '민중예술'이었는가? ... 민중예술이라는 말을 전문가가 직업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예술작품이라고 해석한다면, 이 시대의 예술은 결코 민중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 ... 대부분은 비상한 숙련의 흔적을 담고 있어, ... 교육과 장기간의 수련을 거치지 않은 아마추어들의 심심풀이 작업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야만족'의 침입 후 서방에서는 새로운 귀족과 새로운 문화 담당층을 지닌 새로운 사회가 발생했다. ... 수세기에 걸친 불모상태가 계속되었다. ... 로마의 경제, 사회, 예술의 몰락과 소멸은 서서히 이루어지고 중세로의 이행은 한걸음 한걸음씩, ... 진행되었다. 이 발전이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 말해주는 것은 로마시대 경제체제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게르만족의 서구 정복은 게르만인 내부에서 예부터의 종족국가가 자취를 감추고 이를 대신해 절대군주제가 출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왕들은 이런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정복전쟁을 통해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은 세습귀족을 거의 다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로빙거 왕조에서는 상당히 폭넓은 지배계층이 새로 형성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 새로운 귀족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 게르만 시대 세습귀족의 잔존 세력을 빼면 ... 다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 로마 원로원 의원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 이 귀족은 인종적으로도 결코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갈리아인, 로마인, 게르만인 들로 구성되었고 그 내부에서는 적어도 로마인에 비해 프랑크인이 더 우대받는 일은 없었다.
 
6세기 이래 이미 관공리들, 특히 '아무아무 백작'이라고 불린 고급 행정관리들 가운데는 봉급 이외에 포상으로 왕국의 일부를 할당받는 경우가 있었다. ... 얼마 안되어 토지의 증여에는 어떤 종류의 특전과 면책특권이 결부되게 되었다. 즉 국가가 전국에 걸쳐 ... 보호할 능력이 없음이 분명해짐에 따라 ... 대지주들이 ... 자기 영토 내에서는 국가와 동등한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메로빙거 왕조에서 예술이 침체한 주요 원인은 도시가 피폐하고 이 왕조에 고정된 수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 아랍인의 손에 의해 바그다드와 꼬르도바 같은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던 시기에 서방에서는 프랑크 왕조 전시기를 통해 이렇다 할 도시가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카를대제의 등극과 더불어 프랑크 왕조의 성격은 일변한다. 세속적인 권력을 가진 데 지나지 않았던 메로빙거 왕조는 일종의 제정일치체제를 가진 카롤링거 왕조로 바뀌고, 프랑크 왕은 기독교 세계의 비호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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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2022년 3월 18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71-277
 
"제4장.중세 - 05.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중에서
 
아인하르트(775-840. 동프랑크, 카를대제의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카를대제는 지난 시절의 분쟁과 전투에 관한 '옛날 야만시대의 노래'들을 수집하고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를대제 시대에는 이런 영웅가요가 이미 상류층의 취미에는 맞지 않게 되고 고전적인 고급 문학작품을 애호하였다. ... 그가 기록을 명했다는 사실도 그것들이 이미 없어질 위험에 놓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제가 수집해놓은 것 자체도 망실되고 말았다.
 
낭만주의 문학사가 내세우는 '민중서사시'는 원래 민중과 아무 관계도 없는 문학이었다. 서사시의 근원이 된 송가와 영웅가요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철저한 귀족계급의 문학이었다. ... 철두철미하게 직업시인의 손으로 된 문학이었고, 귀족예술이었다.
 
민족대이동 시대와 영웅시대에 처음으로 대두된 개인 시인들은 아마 그들 스스로가 아직 무사이자 왕의 측근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베어울프>에서는 대공들과 용사들 자신도 시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 머지않아 직업시인에게 자리를 내어놓게 되며, ... 대부분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게르만족 궁정시인들은 어떤 때는 자작시를, 또 어떤 때는 타인이 만든 시를 불렀는데, .... 청중의 갈채는 시의 내용보다도 음송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노르웨이인들은 시의 작자와 음송자를 엄격히 구별했으며, ... 모티프의 독창성을 매우 중요시 했다. 작품과 더불어 그 작자의 이름까지 전해졌다. 이런 현상은 북유럽 외에는 성직자작가가 등장하기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으로, 북유럽에서는 시인이 무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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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22년 3월 18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77-287.
 
"제4장.중세 - 05.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중에서
 
 
영웅시를 민중예술로 보는 낭만파의 이론은 본질적으로는 영웅서사시에 포함된 역사적 요소를 해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이 지닌 선전도구 기능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야코프 그림(Jakob Grimme, 1785-1863)은 그의 신비주의적 민속학 이론을 밀고나가 민중서사시의 '저작'이라는 것이 애당초 있을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시인이 의식적, 계획적으로 작용하지 않아도 전통 그 자체가 상당히 길고 통일적인 서사시의 줄거리를 낳을 수 있고, 따라서 민중의 공유재산을 형성하는 이런 줄거리를 빠뜨리지 않고 정연하게 이야기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넌센스다.
 
아무리 미숙한 수준이라도 그 자체로 완결, 고정되고 통일적인 줄거리란 이미 설화가 아니라 문학작품이며, 그것을 최초로 이야기한 인간은 바로 그 작자인 것이다. ... 영웅전설은 발생 당초부터 하나의 시, 하나의 노래이고 또 그런 형태로 전승되고 변형된다.
 
낭만파 이래의 모든 설화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조제프 베디에(프랑스 문학사가)에게도 문제는 서사시에 내포된 역사적인 요소가 대체 어디서 나왔느냐는 데 있다. ... '샹송드제스트'(chanson de geste, 무훈시) 속에 담긴 역사적 소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샹송드제스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도사들의 사상이나 순례자들의 감정과 더불어 동서 십자군원정, 봉건사회와 기사계급의 이상과 감정도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음...
 
음유시인(minstrel)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 음유시인은 중세 초기의 궁정가인과 그리스-로마 이래 미무스의 혼혈아라고 말해진다. 미무스는 고대 이래 계속 번창해왔다. ... 중세 초기의 게르만 여러 나라에서는 도처에서 그들의 모습이 띄었다.
 
그러다가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와 다음 몇세대의 교회중심주의의 결과 이들 궁정시인은 상류사회의 고객을 잃고 하층민 사이에서 미무스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 스스로 미무스 연기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얼마 후에는 양자를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미 미무스 연기자도 궁정가인도 없고, 오직 음유시인만 남은 상황이 온 것이다. 음유시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면성이다. 신분이 높고 고도의 전문기술을 갖춘 영웅가요의 시인 대신에 이제 속된 팔방미인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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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22년 3월 21일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86-297.
 
"제4장.중세 - 06.수도원에서의 미술품 생산의 조직화
 
카를대제의 재위기간이 끝난 뒤로 궁정은 이미 제국의 정신적 중심지가 아니었다. 학문, 미술, 문학 일체의 거점은 이제 수도원이고, 당대의 정신적 소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도원 부속 도서관, 서실, 사본 제작소에서 진행되었다.
 
베네딕트회 계율은 학문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작업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오히려 육체노동을 더 중요시했을 정도였다. ... 수도사들의 활동범위는 밭일과 정원일에 그치지 않고 수공예 분야까지 미쳤다.
 
서양에 조직적인 노동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것은 수도원이었다. 중세 산업의 대부분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 수공업은 수도원에서 비로소 가내경제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시간 관리가 최초로 행해진 것도 여기(수도원)에서였다. 즉 하루의 시간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이용하며, 시간의 경과를 재어 종을 쳐서 알리는 일 등이 수도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분업의 원리는 생산의 기초가 되고, 개별 수도원 내부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수도원들 상호간에도 실시되었다.
 
필사본 복제와 그 삽화 장식은 예로부터 수도원이 가장 자랑삼던 일 중의 하나였다. ... 필경실은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경우 커다란 공동작업장이 있었고, ...
 
어느 수도원에서나 필경과 화공의 일은 내용에 따라 전문화되어 있었다. 즉 미니아뛰르를 그리는 화가 이외에도 숙련된 필경사와 그 조수, 첫글자 장식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각 수도원은 개개가 하나의 산업중심지가 되다시피 했다. 꼬르비 수도원은 처음에는 겨우 네개의 주요 공장과 29명의 종업원으로 출발한 데 비해 생리끼에(St. Riquiet)에서는 9세기에 이미 대장장이, 안장장이, 제본공, 구두장이 등의 작업장이 분야별로 갈라져 여러 거리를 채우게까지 되었다.
 
수도원 부속공장은 ... 일종의 공학기술연구소를 겸한 경우가 많았다. 베네딕트회 수도사 테오필루스는 11세기 말에 쓴 그의 교본 <제반 기예 교정>에 유리 제조법, 창에 끼우는 유리화 굽는 법, 유화물감 혼합법 등 여러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각종 발명을 많이 열거해놓았다.
 
떠돌이 예술가와 장인 들도 대부분은 수도원 부속 제작소 출신이었다. 수도원 부속 제작소는 중세의 '미술학교'를 겸하여 젊은 기술자 양성에 특히 큰 힘을 기울였다.
 
수도원이 교회 건축 발달에 기여한 바는 대단히 크다. 도시가 성장하고 부속 건축소가 생기기까지 교회 건축은 거의 성직자의 손에만 맡겨져 있었다. 
 
중세 미술사에서 수도원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로 중세에 관한 낭만주의적 신화의 일부이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남아 역사적 사실의 공정한 판단을 흐리는 일이 많다.
 
서사시에 개인 작자가 있었음을 부정한 것과 같은 논법으로 이들 건축 배후에 있는 건축가의 존재를 부정했다. ... 예술가가 항상 익명으로 일했다는 것도 중세에 관한 낭만주의자들의 신화에 속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세 예술가로서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거의 수도사들뿐이며, 더구나 예술활동이 수도사의 손에서 속인의 손으로 넘어오던 바로 그 무렵부터 익명의 작품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즉 교회미술 작품에 작자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수도사들 자신이었던 만큼 그들이 자기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 즉 수도사에게 우선권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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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
2022년 3월 30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297-311.
 
"제4장.중세 - 07.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1)
 
 
🌹 귀족계급과 수도사집단
 
로마네스끄 예술은 수도원의 예술인 동시에 귀족계급의 예술이기도 했다. .... 중세 교회의 요직도 귀족계급 출신자에게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런데 수도원장과 주교 들이 봉건제도와 그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귀족계급 출신이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그들의 귀족적인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끌뤼니(Cluny) 수도원에서 발단한 금욕적인 개혁운동 이후의 일이며, 민주주의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말할 수 있는 것은 13세기에 금욕주의적 쇄신운동이 일어난 다음부터다. ... 이들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미술품이 세속 귀족계급의 정신과 일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봉건제도의 발달
 
프랑크 왕국의 군인귀족과 관료귀족에서 출발하여 이미 9세기 말에는 완전히 봉건화되어 있던 귀족계급은 이 무렵에는 사회의 최첨단에 서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 
 
그들은 자신들이 한때 어떤 특정 직업군에 속했다는 사실을 ... 잊어버리고 이제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이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훈련된 관리의 부족, 이민족 침략 위험이 증대와 장기화, 주로 아랍인에 대항하기 위해 장갑기병대를 도입할 필요성 등으로 인해 ... 전력장비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고 ...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했으므로 국가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재정적 부담을 의미했다.
 
봉건제도는 9세기의 국가가 이런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 '폐쇄적 가정경제'
 
봉건제도는 화폐경제나 교역 없이 토지소유가 유일한 수입원이자 재산형태였던 중세 초기에는 나라의 통치와 방위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의 가장 편리한 해결책이었다.
 
도시는 매력을 잃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 ... 일체의 경제-사회생활의 중심은 이제 귀족의 장원(manor)이 이었다. 독일의 경제학자 카를 뷔허는 이 제도를 '폐쇄적 가정경제'(geschlossene Hauswirtschaft)라고 부르고 ... 완전한 자급자족체제를 그 특징으로 보았다.
 
중세에 완전히 자급자족적인 순수한 가정경제가 행해졌다는 추정은 근거없는 것임이 판명된 바 있다. ... '교환행위가 없는 자연경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시장을 갖지 않은 경제'라고 수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 전통주의적 사고방식
 
중세 초기 경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인 동시에 이 경제가 당시의 정신문화에 가장 깊이 영향을 끼친 측면은 자급에 필요한 한도를 넘어서 생산하려는 의욕이 전혀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 ... 
 
소극적인 경제원리와 정체적인 사회구조에 호응하여 당시의 학문, 미술, 문학에서도 일단 인정된 가치를 견지하는 엄격하고 고루한 보수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의 형이상학은 철학 영역에서 모든 특수한 것, 개인적인 것을 가차없이 배제했으며, 지적-정신적 영역에서도 당시 사회의 지배형태에 나타난 것과 똑같은 권위 및 위계질서의 원리를 관철했던 것이다.
 
🌹 로마네스끄 교회 건축
 
교회의 절대주의적 문화정책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10세기 말 이후, 즉 끌뤼니 수도원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으로 새로운 정신주의적 경향과 지적 경직성이 대두한 이후부터였다.
 
로마네스끄 양식의 거대한 교회가 건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인데, ... 11세기는 스꼴라철학 및 종교적 색체를 띤 프랑스 영웅시의 전성시대인 동시에 교회 건축의 일대 번영이기도 했다. ... 이 시기에 교회 재산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로마네스끄 예술의 종교적 성격은 궁정사회, 도시 당국, 국가의 중앙권력 등이 붕괴한 결과 실질적으로 교회가 예술품의 유일한 고객이 되었다는 사정의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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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2
2022년 3월 30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11-323.
 
"제4장.중세 - 07.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2)
 
🌹 로마네스끄의 형식주의
 
고대 초기의 기하학적 양식에서 고대 말기의 자연주의로, 초기 기독교 시대의 추상화 경향에서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절충주의로, ... 이러한 ... 변화는 로마네스끄 시대에 이르러 또다시 비자연주의적인 유형화와 형식주의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엄격한 형식주의와 현실의 추상화 경향은 로마네스끄 예술의 가장 중요한 양식적 특징임에 틀림없지만 유일한 특색은 결코 아니다. ... 병행하여 주정주의-표현주의 풍조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좀더 자유로운 예술관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로마네스끄 후반기에 들어서야 가능 ...
 
🌹 로마네스끄 후기이 표현주의
 
이 시대가 되면 예술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갖가지 과장수단이 사용된다. 즉 실물의 비례를 왜곡하고 ... 눈과 손을 특별히 크게 만들며 ... 표현주의 경향의 뚜렷한 증거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원동력이 된 것은 끌뤼니 개혁운동의 정신주의와 행동주의였다. ... 모두 금욕적 개혁정신과 묵시록적인 최후심판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
 
로마네스끄 양식은 영적 표현만을 겨냥한 예술이자 감각적 경험의 논리가 아닌 내면적 비전의 논리를 기준으로 한 법칙을 따르는 예술로 보인다.
 
🌹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수난
 
로마네스끄 미술이 도해(圖解)를 즐기는 경향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장식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강해졌다. ... 나중에는 성서 내용 전부가 도해의 대상이 되었다.
 
후기 로마네스끄 조각의 주요 테마는 최후의 심판이었다. ... 그것은 천년왕국설을 내세운 일종의 정신병적 말세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교회 권위의 가장 강렬한 표현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큰 주제인 그리스도의 수난을 로마네스끄 미술에서 즐겨 다룬 것은 ... 주정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로마네스끄의 그리스도 수난상은 천대받고 고난에 찬 신의 묘사를 거부하던 과거 시대와 구세주의 상처를 일일이 들추는 데서 오히려 쾌감을 맛보던 이후 시대 사이의 중간지점에 서 있다.
 
로마네스끄 미술의 수난상에서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늘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의 경우 십자가에 서 있으며 보통은 눈을 뜨고 있을뿐더러 왕관을 쓰고 옷을 걸치고 있는 예도 많다.
 
🌹 중세의 세속예술
 
로마네스끄 후기의 예술이 서사시에서 따온 소재의 도해에 얼마나 열중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는 <바이외 테피스트리>(Bayeux Tapestry)로, ... 교회 장식품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예술과는 다른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이 지극히 유연한 양식으로 다양한 삽화에 섞여 그려져 있고, ... 분명히 이것은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어느정도 독립적인 제작소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만을 근거로 당시의 세속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 당시의 초상미술이다.
 
초기 기독교의 분묘예술에서 죽은 당사자는 전혀 나타나지 않든가 매우 조심스럽게 약간만 나타날 뿐인 데 비해, 로마네스끄 시대의 묘비에 이르면 죽은 이가 주된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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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
2022년 3월 31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23-330.
 
"제4장.중세 - 08.궁정적﹒기사적 낭만주의" (1)
 
🍋 고딕의 발생은 근대 예술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자연에 대한 충실, 감정의 깊이, 감각성과 감수성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양식상의 이상은 고딕의 소산이었다.
 
이렇듯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이처럼 현대적인 감각에 접근한 새로운 예술관은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일까? 이 새로운 양식이 생겨난 배후에는 어떤 현실 생활의 변화,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개재한 것일까? ... 어떤 돌발적인 변화를 말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고딕시대가 ... 최초에는 역시 11세기 봉건제도의 사회﹒경제체제와 로마네스끄 예술과 문화의 정체성을 흔들어놓은 과도기의 단순한 연장이자 그 완성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화폐﹒교역경제의 맹아와 도시에 살면서 상공업을 영위하는 시민층이 부활하는 최초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이 과도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일이었다.
 
🍋 도시의 재흥
 
... 생활의 중심은 또다시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모든 새로운 것이 도시에서 발생하며, 모든 길이 도시로 통하게 된다. ... 중세 도시와 고대 도시국가의 가장 큰 차이점은 후자가 주로 행정의 중심지였던 데 반해 전자는 거의가 그저 물품 교역의 중심지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문화사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은 수공업자와 상인이라는 새로운 두 직업집단의 발생이었다. ... 여하간 상인층이라 할 만큼 통합된 집단은 없었던 것이다. ... 
 
12세기 이후로는 원생산자 이외에 독립해 있을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도시 수공업자들과 독자적인 직업계층을 구성하는 전문화된 상인층이 발생하게 된다.

 

🍋 새로운 화폐경제
 
이제까지 단 하나의 중요한 재산형태였던 토지소유 이외에 유동적인 영리자본이라는 새로운 부의 형태가 생겨난 것은 그들(상인층)의 공적이었다.
 
도시의 화폐경제는 봉건제도의 모든 경제기구를 붕괴위기로 몰아넣었다. ... 잉여생산물의 판매가 가능해지자 이 비능률적이고 비야심적이며 비생산적인 경제단위인 장원에도 또다시 활기가 불어넣어졌다.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에서 지주에게 돌아가는 몫은 전통과 관습에 의해 상당히 엄격하게 제한 ... 잉여는 당장에는 농민들에게로 돌아갔다.
 
지주계급의 화폐 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 사치스러운 신제품들이 잇따라 쏟아져나와서 그들의 구매욕을 자극했던 것이다. ... 고정수입밖에 없는 지주귀족에게 경제적 곤경을 초래하게 마련이었으며, ... 
 
소유지에서 이제까지 경작되지 않은 부분을 개발 ... 현물로 받던 지대를 금납으로 대체 ... 토지를 농노에게 경작시키는 것이 이미 이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 신분이 묶이지 않는 농노가 ... 일을 훨씬 잘한다는 사실 ... 미리 분량이 정해져 있는 노동을 ... 훨씬 더 환영한다는 사실을 지주들도 이제 터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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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2
2022년 3월 31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30-336.
 
"제4장.중세 - 08.궁정적﹒기사적 낭만주의" (2)
 
🍋 시민계급의 대두
 
시민층은 그런 토지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토지소유는 ... 높은 사회층에 다가갈 수 있는 사다리였던 것이다.
 
그들은 ... 귀족보다 오히려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 귀족사회의 생활예법에 따라 소비하는 요령은 알지 못했다. ...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시 시민층은  ... 무시할 수 없는 사회집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그들은 근대사의 주역을 맡았고 서양문화에 자신의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되는 이른바 '제3계급'으로서 모든 사회활동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 문화의 세속화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도시의 예술이자 시민적인 예술이었다. 즉 수도원과 귀족의 예술이던 로마네스끄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 성직자의 영향이 감소했다는 의미에서도 ... 어느 고위성직자가 자기의 재력만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에서도 도시적이고 시민적이었다.
 
기사문화 전체가 옛날부터의 봉건적﹒위계질서적 생활감정과 새로운 시민적﹒자유주의적 사고방식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시민계급의 영향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것은 문화의 세속화 현상이다.
 
기독교 자체가 이미 ... 민중종교로서의 색채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의식이나 교리 등의 요소보다도 도덕적 내용이 중요시되었다.
 
문화의 세속화라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상업중심지로서의 도시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 중세 초기에는 한번도 볼 수 없던 정신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 일종의 보편주의, 국제적﹒코즈모폴리턴적 풍조를 찾아볼 수 있었다.
 
... 인구의 많은 부분이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을... 신자들은 순례의 길을 ... 상인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 농민은 고향을 버리고 .. 장인과 예술가들은 각지의 건축장인조합을 ...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에서 대학으로 ... 방랑문인 사이에서는 방랑생활을 찬미하는 일종의 로맨틱한 풍조마저 일게 되었다.
 
상인들이 필요로 하는 교양도 성격상 교회의 정신적 보호에서 점차 이탈 ... 12세기에는 이미 대도시, 중도시마다 ... 모든 라틴어학교에서 민중의 일상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 마침내 13세기에 오면 이미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교양있는 세속인사가 출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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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22년 4월 1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35-345
 
"제4장.중세 - 08.궁정적﹒기사적 낭만주의" (3)
 
🍋 기사계급
 
12세기에 일어난 사회구조상의 변화는 결국 출생에 따른 신분차이에 직업에 의한 신분차이가 중첩된 것이었다. 기사계급(knighthood)이라는 것도 나중에 세습신분으로 변했지만 처음에는 직업에 의해 형성된 신분이었다.
 
제후와 대지주 모두가 말을 탄 무사들과 헌신적인 가신을 꼭 필요로 했다. ... 봉토가 세습됨과 동시에 ... 종신이 세습신분인 기사로 바뀌는 것이다.
 
기사계급의 도덕체계 속에서 충성이 아주 소중한 덕목으로 꼽힌 것도 원래 그들의 충성심이 그다지 믿을만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 기사의 계급의식
 
... 기사라는 귀족의 탄생도 농노를 시민으로, 부자유스러운 농민을 자유신분의 임금노동자나 독립경영이 소작인으로 바꾸어놓은 당시 사회 일반의 유동화 경향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음...
 
기사계급이 세습신분으로 변화하고 외부에 폐쇄적인 군인계층이 된 시점이야말로 중세 귀족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의 하나이고, ... 기사의 계급적 이상, 귀족의 계급의식, 계급적 이데올로기는 이때부터 비로소, 그것도 바로 기사계급에 의해 형성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기사계급의 낭만적 이상주의와 의식적이고 '감상적인' 영웅주의는 실은 재탕된 이상주의요 영웅주의였으며, 기사계급의 명예라는 개념을 형성해간 신흥귀족의 자의식과 야심에 주로 기인한 것이었다. ... 그들의 불안과 약점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
 
🍋 기사계급의 도덕체계
 
고귀한 인격이 고귀한 출신가문보다 가치가 높다는 이런 사고방식은 봉건적 군인계층이 이미 완전히 기독교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 교회는 ... 모든 수단을 다해 ... 그들을 예수를 위한 전사로 취급했고, ...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다.
 
기사도덕의 전체계를 관철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 귀족윤리와 마찬가지로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의 이념이었다. 기사의 덕목은 어느 하나도 체력과 육체적 훈련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
 
기사계급은 이들 고대 그리스﹒로마 윤리의 근본 개념을 주로 중세 라틴어 문학의 중개를 통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 기사계급은 부르주아적 화폐경제가 자기들 생활의 물질적 기초를 위협한다고 느끼고, ... 노블레스 오블리주' 원리로 일관된 그들의 모든 생활태도는 부르주아 정신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 '궁정적'의 개념
 
중세 기사계급의 문화는 궁정을 중심으로 한 문화로는 최초로 근대적인 것 ... 궁정의 주인과 그의 신하가 거기 있는 시인 사이에 진정한 정신적 유대가 이루어진 궁정문화는 이제까지 없었던 것이다.
 
... 문학 분야의 지도적 역할은 정신적 시야가 좁은 성직자층에서 기사계급 쪽으로 옮겨갔다. ... 수도원 문학은 그 지도적 지위를 잃고 ... 시대의 전형은 ... 고귀하고 오연하며 영리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도의 훈련을 쌓은 기사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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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22년 4월 4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45-357
 
"제4장.중세 - 08.궁정적﹒기사적 낭만주의" (4)
 
🍋 문화역군으로서의 여성
 
중세 궁정문화가 이전의 모든 궁정문화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그것이 뚜렷하게 여성적 성격을 띤 문화라는 것 ... 여성이 ... 참여했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남성 자신이 여러가지 면에서 여성적 사고방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
 
시인들은 여성을 염두에 두고 시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여성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보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오히려 높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다 치더라도, 애당초 어째서 교양이 그만한 사회적 평가를 받아서 여성이 교양으로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의문...
 
🍋 고대 그리스﹒로마 문학 및 기사문학의 모티프로서의 연애
 
연애라는 주제를 발견한 것이 물론 궁정적 기사문학은 아니지만 그것은 연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 고전주의 이전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의 그리스 서정시가 취급한 것도 전적으로 육체적인 사랑이다. 
 
연애이야기가 갖는 독특한 매력을 발견한 것은 헬레니즘 시대였고 ...헬레니즘 시대를 빼면 낭만적 주제로서의 연애는 기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 기사계급의 연애관
 
연애가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찬미의 대상이 되고 사랑은 아끼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라는 감정을 낳았다는 점에서 기사문학은 새로운 것이었다.
 
... 사랑을 구하는 편이 남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남녀 본래 관계의 역전을 의미했다. 노예 약탈과 부녀 납치가 다반사였던 고대와 영웅시대에는 남자 쪽에서 구애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근대 낭만적 연애관의 근간을 이루는 이 갖가지 특색은 모두가 이 기사문학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 당시의 영웅적인 생활감정과 모순되게 보이는 이런 특정한 연애이상의 발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주군에의 봉사와 연애에의 봉사
 
연애시는 주군에 대한 봉사관계를 그 부인에게 옮겨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는 학설은, 제후와 호족 들은 전쟁에 몰두하여 ... 장기간 비울 수 밖에 없었고 그의 부재기간에 부인이 군주의 권력을 행사했다는 사정을 생각할 때 더욱 설득력이 있다.
 
🍋 기사적 연애의 허구성
 
... 기사적 연애문학의 표현 형식은 처음부터 뚜렷한 문학적 인습으로 나타난다. 트루바두르의 서정시는 일종의 '사교계 문학' ... 구애에 담긴 감정적 요소는 '의식적인 자기기만'이자 사회 전체의 묵계에 의한 일종의 놀이였으며 공허한 인습이었다.
 
새로운 연애숭배나 감상적인 새로운 궁정문학의 배양도 주로 이들 비교적 유동적인 신분의 사람들(영락한 기사들, 신흥계층 등)에 의해서였다.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이렇게 연애라는 성정인 형태로 바뀐 데에는 성심리학적인 요소도 한몫했음에 틀림없지만, 이 성심리학적 요소 자체도 사회학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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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
2022년 4월 5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57-370
 
"제4장.중세 - 08.궁정적﹒기사적 낭만주의" (5)
 
🌷 성심리학으로 본 기사적 연애
 
궁정과 성에는 항상 남자가 많고 여자는 얼마 안되었다. ... 궁정사회의 중심은 제후의 부인이나 성주의 부인이었고, 모든 것이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 외딴섬처럼 외부와 격리된 사회에서  ... 극도의 성적 긴장상태가 조성되었을 것은 틀림없고, 많은 경우 다른 배출구를 찾아... 궁정적 연애라는 승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 종전의 종교적 사회적 터부의 위력이 쇠퇴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신흥귀족의 등장으로 ... 터전이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학사적 전거의 문제
 
궁정적 연애서정시가 외부에서 받은 영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중세 라틴어로 씌어진 수도원 문학에서 왔다고 생각된다. ... 기사계급의 연애서정시와 중세 수도원 문학의 관계는 직접적인 영향이나 차용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평행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사도의 부인숭배가 기독교의 성자숭배에 따랐을 가능성은 쉽사리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연애의 봉사'가 '마리아 숭배'에서 유래했다는 낭만파 특유의 상상에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
 
기사계급의 새로운 연애 개념이 마리아 숭배로 고취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리아 숭배가 궁정적 기사적 연애의 특생을 이어받은 것이다.
 
🌷 성직시인의 몰락
 
... 트루바두르 문학은 교회의 금욕적 위계질서적 정신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세속문학이었고, ... 그리하여 수도원이 문학의 거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던 약 300년에 걸친 시기는 끝났다.
 
기사계급이 시인으로 등장한 것은 속인층이 문학의 세계에서 단순히 수동적인 역할밖에 않았던 이전 시대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새로운 사건이었고, ...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의 하나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 트루바두르와 음유시인
 
... 귀족계급의 일원인 트루바두르와 평민 음유시긴 사이의 사회적 거리는 적어저 ... 나중에는 평준화의 결과로 이미 근대의 시인과 매우 가까운 유형이 특히 프랑스 북부에서 나타났다.
 
이새로운 유형의 시인은 이미 낭송용 시가 아닌 개인적 독서를 위한 책을 썼다. ... '읽는다'는 것이 감상벙법의 새로운 형식이 된 것 ... 문학감상이 열렬한 취미가 되고 매일의 요구가 되고 습관이 된 것은 문학이 '독서'가 된 이 시기 이후의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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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2
2022년 4월 5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70-377
 
"제4장.중세 - 08.궁정적﹒기사적 낭만주의" (6)
 
🌷 독서를 위한 소설
 
낭송이나 낭독이 아닌 독서용 문학에는 전혀 새로운 서술기업이 요구된다. ... 작품의 통일성은 그 작품의 구성에서보다 전체를 일관하는 세계관과 생활감정의 동일성에서 오는 것 ... <롤랑의 노래>가 이런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 메네스트렐
 
... 13세기 말엽이 되면 또다시 새로운 분화가 생긴다. ... 궁정에 전속한 메네스트렐과 ... 영락해 일정한 주인을 잃은 익살꾼이 출현했다. ... 떠돌이 음유시인들은 ... 하층계급 사람들만 상대 ... '메네스트렐'은 '종신'이었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시인, 학자들의 진정한 선구자였다.
 
🌷 방랑문인
 
방랑문인이란 음유시인으로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신부나 학자, 또는 수도원을 도망쳐나온 수도사나 학업을 때려치운 학생이다. 즉 일종의 영락계층이자 보헤미안이었다.
 
... 교회 및 지배계급에 대해 조금도 존경심이 없으며, ... 반역아요 자유사상가였다. ... 그들은 사회적 균형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희생자의 하니이고 일종의 과도기 현상이었다.
 
전에는 ... 모든 학생의 장래를 보장하던 교회도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열기가 높아져 학교와 대학에 가난한 청년들이 가득 차게 된 이제는 이미 이들 청년을 모두 받아들여서 적당한 지위를 마련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 청년 중 다수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일부는 방랑문인으로 구걸과 흥행생활에 나서게 되었다. ... 자기들을 이렇게까지 박대하는 사회에 대해서 그들 문학의 독설과 예봉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통렬한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파블리오
 
방랑문인의 연애서정시가 트루바두르의 연애서정시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그것이 여성을 찬미한다기보다 도리어 경멸하는 어조로 ... 모든 인습적인 터부를 거리낌없이 공격 ...
 
방랑문인은 ... 시민계급을 상대하기도 했는데, 사회의 권력자들에 대한 자기들의 사사로운 싸움에서 그들을 동지로 간주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 대한 경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파블리오는 ... 시민계급의 계급문학은 아니었다. ...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문학으로서, ... 시민계급의 자조의 정신이 이 문학을 상류계급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 문학의 부르주아화 현상은 크게 촉진된다. 문학과 그 독자가 시민화함에 따라 시인 또한 시민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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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22년 4월 7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77-397
 
"제4장.중세 - 09.고딕 예술의 이원성
 
🌲 고딕의 범신론과 자연주의
 
고딕시대의 정신적 유동성은 문학작품보다 조형예술에서 대체로 더 잘 살펴볼 수 있다. ... 조형예술 활동은 이 시대 전체를 통해 하나의 비교적 통일적인 직업층과 결부되어서 거의 단절없이 계속적인 발전 ...
 
고딕의 이원성을 가장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은 이 시대가 자연을 대하는 감정이다. ... 고딕의 범신론은 역시 필연적인 귀결로서 자연의 명예회복에 기여했다. 프란체스코회 운동 이전에는 인간만이 인간의 '형제'였는데, 이 운동 이후로는 모든 생물이 인간의 동포로 여겨졌다. ... 자유주의 경향의 산물 ...
 
🌲 개인주의의 맹아
 
고딕의 자연주의는 풍경묘사보다 인물묘사에 훨씬 철저하고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 개성적인 것에 대한 감각은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의 움직임의 첫 징후 가운데 하나 ... 
 
🌲 '진리의 이중성'
 
그러면 과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 자연적 감각적 현실과 광범위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는 예술관이 등장 ... 이런 변화는 우선 진리의 개념 자체가 변화하여 종전의 일면적 진리 개념 대신에 양면적 진리 개념이 등장한 연후에야 생겨날 수 있었다.
 
당시 철학의 유명한 '진리의 이중성'에 관한 학설이 예술세계에도 적용 ... 이 학설이야말로 낡은 봉건적 전통과 단절되고 교회로부터의 정신적 해방이 시작됨으로써 생긴 분열상태를 가장 명료한 형태로 표현 ...
 
이미 절대적인 신앙과는 인연을 끊었으며 과학과의 연결은 아직 충분치 않던, ... 어떻게든 양자를 종합함으로써만 그 문화를 유지할 수 있던 이 시대에는 유일한 돌파구였던 것이다.
 
🌲 유명론의 세계관
 
관념의 현실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경험적 현실세계의 사물과 불가분의 것으로 간주하는 온건한 유명론이야말로 ... 고딕시대의 모든 이원적 성격의 열쇠였다.
 
유명론이 맡은 기능은 고대 그리스 예술 및 문화에서 소피스트 철학이 맡았던 역할과 정확히 일치 ... 반전통주의적 사고방식 ... 자유주의 색채를 띤 시대의 전형적인 철학사상 ...
 
🌲 순환적 구도형식
 
고딕미술은 아직 '부가적'(additive) 구도가 지배적 ...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시간적 공간적 통일성과는 거의 정반대 ...
 
중세의 '영화극'은 고딕 예술에서 질적으로는 아마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겠지만, ... 고딕 예술의 가장 특징적인 작품 ... 그토록 많은 고딕의 대성당이 미완성인 채로 남은 원인이 된 이 새로운 예술의욕, ...
 
🌲 고딕 건축의 예술의욕과 기술
 
... 이원성은 고딕 예술, 특히 고딕 건축의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라는 형태로도 드러난다. ...  중세 초기처럼 대체로 사회적 갈등이 없던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예술의욕과 기술 사이에 근본적인 대립이 없다. ... 
 
이에 반해 고딕시대처럼 문화 전체가 모순에 차 있는 시대에는 예술의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이 제각기 다른 것을 표현하려 하고, ... 기술은 합리적 성격을 띠는데 형식원리는 흔히 비합리적인 성격을 띠는 수가 있는 것이다.
 
🌲 고딕 예술의 역동성
 
로마네스끄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그 이상 아무것도 구할 바 없는 안정된 공간상 ... 이에 반해 고딕 교회는 생성의 상태를 계속하면서, 말하자면 우리 눈앞에서 솟아나고 있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 고딕 이래의 모든 위대한 예술은 어딘가 단편적인 데가 있고, 내면적으로든 외면적으로든 완결되지 않고,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마지막 한마디는 다하지 않은 채 멈춰버린 면이 있다.
 
고딕 예술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의 출발점이며, 그 중대성과 폭에 있어 이후의 어떠한 전통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 새로운 감수성과 기술만능주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전적으로 새로운 것, 전혀 비고대적인 것, 그러면서도 능히 고전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고딕 예술이다.
 
고딕의 근본 특색을 이루는 섬세한 감수성은 ... 고딕시대의 기독교적 정신주의와 현세긍정적인 감각주의가 교착하여 생긴 독특한 형식이었다.
 
고딕시대와 이후의 모든 예술로 하여금 일종의 고백적 성격을 띠게 한 그 표현의 친밀성은 고딕에서 비롯한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 고딕과 더불어 근대예술의 서정성이 시작되었지만, 그 기술만능주의 역시 고딕시대에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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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22년 4월 12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396-407
 
"제4장.중세 - 10. 건축장인조합과 길드
 
🍒 건축장인조합에서의 예술활동의 조직화
 
건축장인조합은 12, 13세기에 발달한 대규모 교회 건축에 종사하는 예술가와 장인의 조합으로, ... 건축에서 예술감독과 행정감독의 관계는 말하자면 영화에서 감독과 제작자의 관계와 비슷하다.
 
고딕시대 건축장인조합은 교회 건축에 장기간이 걸릴 경우에는 몇세대에 걸쳐 한곳에 머무는 일도 없지 않았으나, ... 예술가나 장인이 방랑생활을 하며 자유로이 한 건축장인조합에서 다른 조합으로 옮겨다녔다 ... 어디서 일어난 것이든 새로운 움직임이 곳곳에서 재빨리 받아들여지고 곳곳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
 
하지만 예술의 창작이라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정신작업에서 이런 분업체제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 미술품의 집단제작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낭만주의적 특징을 빼면 서로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1) 집단적인 생산방식이야말로 최고의 미술품을 생산해내기 위한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라는 것,
 
(2) 이렇게 작업이 세분화되고 개개 예술가와 장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진정으로 우수한 예술작품의 생산에 최소한 일종의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인간 정신의 여러 능력과 기능을 지나치게 단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 근거 없는 낭만주의적 환상이다. ... 개개인의 ... 개별적인 표현의 통일은 ... 노력을 통해 비로소 쟁취되는 것이지 우연한 순간의 선물일 수는 없는 것이다.
 
🍒 길드조직
 
작업집단으로서 건축장인조합은 조형예술의 고객이 거의 교회와 도시에 한정되어 있던 시대에 적합한 존재였다.
 
예술가가 건축장인조합에서 독립해 자립적인 우두머리로 한 도시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도시 시민계급의 구매력이 증대하여 ... 고정적인 고객층을 이루게 된 후의 일이다.
 
.. 15세기도 거의 끝나갈 무렵 ... 그제야 건축노동자들도 건축장인조합을 떠나서 ... 길드에 가입한다.
 
🍒 건축현장과 제작소
 
건축장인조합과 길드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피고용자집단이고 ... 위계적인 데 반해, 후자는 적어도 그 시초에는 제각기 독립적인 사업가들이 서로 평등한 자격으로 결합한 단체였다는 점이다.
 
중세미술의 발전방향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은 미술가의 작업장이 점차로 건축현장과 분리되었다는 사실이다.
 
... 조각을 ... 교회당 안에서가 아니라 교회 옆에서 하게 되었고, 조각품은 완성된 뒤에 건물에 설치되었다. ... 회화에서도 패널화의 대두로 벽화가 쇠퇴하면서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후기 고딕의 여러가지 양식적 특색은 미술품 제작장소가 그것을 설치하는 장소에서 분리되었다는 사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 제품의 시민계급적인 절도와 평범한 규모 ...
 
중세 역사의 마지막에 이르면 정착지를 가진 예술가층, 소규모 제작소, 값싸고 다루기 쉬운 재료, 그리고 동시에 자그맣고 아담한 규모와 경쾌하고 독특한 형식을 가진 미술이 있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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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22년 4월 18일 
🍏 매일 읽기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pp.407-427 (1권 끝)
 
"제4장.중세 - 11. 고딕 후기의 부르주아 예술
 
🍇 중세 말기의 사회적 대립
 
중세 후기는 출세한 시민계급이 형성된 시대일 뿐 아니라 시대 그 자체가 시민계급의 시대였다. 중세의 전성기 이래 역사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도시의 화폐﹒교역경제는 시민계급의 정치적﹒문화적 자립을 가져오고 뒤이어 지적 주도권을 안겨주었다.
 
... 그러나 중세 말기의 시민계급은 실로 갖가지 이해집단으로 분열된 복잡하기 그지없는 사회층이었고, ... 봉건귀족은 이미 그 세력이 꺽였던 것이다.
 
자연경제가 화폐경제로 이행함과 더불어 ... 대귀족은 왕의 보호를 받는 신분으로 전락했다. 개개의 지주들은 농노제가 해소되고 봉건영토가 소작지나 자유신분의 노동자에게 관리되는 토지로 바뀜에 따라 전보다 더 부유해진 사람도 있고 더 가난해진 사람도 있지만, ...
 
왕들은 자기의 법률고문과 경제전문가, 비서와 재정담당자 들을 주로 시민계급 출신 중에서 뽑으려 했고, 그 선택에서 첫째 조건이 되는 것은 개인의 실력이었다. ... 이런 변모가 가능해진 것은 먼저 도시 화폐경제의 원리가 국가경영 전체에까지 연장되고 ... 막대한 자금이 확보된 뒤의 일이었다.
 
🍇 기사계급의 몰락
 
국가기구의 변모와 더불어 ... 독점적 군인계층이자 세속문화의 역군인 기사계급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
 
새로운 전쟁기술이 기사계급이 맛본 패배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 자체는 하나의 징후 ... 그들이 전혀 적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의 합리주의 ...
 
기사계급이 시대착오적 존재가 된 것은 그들의 무기가 낙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주의'와 비합리주의가 낡아버렸기 때문이다. ... 기사들은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민계급은 ... 기사계급의 무술시합과 기사도적 연애라는 놀이에 기꺼이 끼어들었지만 ... 유희에 지나지 않았고, 사업에서는 냉정하고 빈틈없고 현실적이었다. 한마디로 비기사적이었던 것이다.
 
🍇 중세의 자본주의
 
중세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운운할 수 있는가 ...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타인의 노동력의 기업적인 활용과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해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것, ... 노동을 ...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든다면 자본주의 시대는 14,5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 문화 담당자로서의 시민계급
 
중세 최성기에 도시의 시민계급 자체는 아직 문화활동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다. ...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 이런 사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 이제는 부르주아지 자신이 문화의 진정한 담당층이 되었다.
 
🍇 중세 말기의 민중문학
 
민중적인 취미는 오히려 문학작품에 더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 부유층만이 손댈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하는 조형예술보다는 문학이 사회 하층에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도 문학이 민중적이었다는 것은 ... 비교적 자유로운 정신이 나타나 있다는 뜻일 뿐이고, ... 어느 하나도 진정한 의미의 민중문학 혹은 민속문학은 아니다.
 
후기 고딕의 민중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장르는 단 하나, 희곡뿐이다.
 
🍇 후기 고딕의 자연주의
 
전성기 고딕미술에서 볼 수 있는 자연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 고전주의의 자연주의적 경향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 중세 말기 미술의 특색은 자연주의적인 성격 자체보다도 그 자연주의의 독자적 가치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중세 말기 문학의 성격묘사가 이전 시대의 묘사방법과 가장 다른 점은 이제 작가는 등장인물 개개의 성격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추구하고 모으고 탐지한다는 점이다.
 
🍇 '영화적' 시각
 
'여행 풍경'이야말로 이 시대 회화의 테마로서 가장 적절한 것이며, 헨트(Gent)의 제단에 그려진 순례행렬은 ... 이 시대 세계관의 근본 형식을 나타낸 것이었다.
 
🍇 필사본 삽화와 판화
 
... 다른 한편에서는 궁정적﹒기사적 문화가 여전히 존속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 문학은 여전히 기사계급의 생활양식에 머무르고 미술은 궁정사회의 공식 목적에 봉사 ... 판에이크 형제의 그림만 해도 ... 상류 부르주아지를 위해 그려진 것...
 
그러나 주목할 것은, ... 미니아뛰르에서까지도 시민계급의 자연주의가 주도권을 잡았다 ... 전통적 교회예술과 궁정예술은 그 정신이 소멸 ... 외적 형식도 차차 사라져갔다.
 
거대한 벽화는 패널화로 바뀌고 귀족 취미의 사본 삽화는 판화에 밀려나게 되었다. ... 회화는 패널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비로소 건축에서 독립하여 부르주아 주택의 이동 가능한 가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소시민들의 미술은 판화였다. 15세기에 이르면 사본까지 기계적으로 복제되어 ... 예술활동의 중점을 개인의 천재에 두지 않고 장인적 측면에 두었던 중세에는 생산의 기계화와 미술의 본질이라는 것이 근대인에게 그런 만큼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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