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런 경의 스위스 제네바의 빌라 Villa Diodati. (그림 :  William Purser의 그림(1832)을 Edward Finden이 판화로 제작. 그림 출처 : British Library)

 

위 그림 속의 집은 시인 바이런 경의 스위스 제네바 별장 빌라 디오다티입니다.

 

1816년 여름밤, 이곳에 바이런과 그의 주치의 존 폴리도리, 시인 퍼시 셸리와 그의 애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며칠째 내리는 비 때문에 집안에 갇혀있어야 했죠.

 

그해는 '여름이 없는 해'로 불립니다. 왜냐하면 일년 전인 1815년 4월 폭발한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때문입니다. 이 유례없는 대규모 화산 폭발은 전세계 곳곳으로 화산재를 퍼트렸고, 그로 인해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고 계속 비가 내려 흉작과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런 음울한 날들 중 어느 폭풍우치던 밤이었습니다. 별장에 모여 있던 네 사람은 무료한 날들이 계속 되자 여러 나라의 귀신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바이런이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직접 귀신이야기를 하나씩 써보면 어떨까?

 

탐보라 화산의 폭발. (그림 : Raden Saleh. 1807-1880. 출처 : the Conversation)

 

2년 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는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은 1816년 겨울, 시인 퍼시 셸리와 결혼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배경은 아주 매력적이고 이야기거리가 많아 보입니다. 젋은 여성, 탐보라 화산, 괴물... 그러나 이런 외부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 것은 이 소설에 담긴 진지하고 날카로운 과학 비판을 가리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당시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고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집의 서재에서 엄청난 독서를 했기때문에 이미 당대의 지식을 상당히 섭렵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은 선구적인 아나키즘 운동가였고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유명한 페미니스트여서 서재에는 중요한 책들이 가득했죠.

 

메리의 어머니는 출산 후 곧 세상을 떠났고 그후 들어온 새 어머니가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메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책으로 혼자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 1797-1851. 그림 출처 : wikipedia.

 

1810년대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때였습니다. 10여 년 전에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1815년에는 나폴레옹이 워털루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이유로 공장의 기계를 부수는 운동(Luddite; 러다이트 운동)을 몇 년째 벌이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것이라는 두려움, 기계에 대한 경계심(실은 자본가에 대한 분노), 더 나아가 과학과 기술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자본가들의 편이었던 정부는 기계를 부순 노동자들을 사형시켰는데, 바이런 등 지식인들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1800년대 초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는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일종의 노동운동이었다. (출처 : wikipedia)

 

또한 당시 사람들은 "동물 전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메리 셸리와 그의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래 그림은 1836년의 정치 풍자 카툰입니다. '전기로 살아난 시체'가 정치 풍자에 사용될만큼 '동물 전기'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전기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없다를 두고  논쟁도 격렬하게 일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803년,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사형수(조지 포스터)에게 프랑켄슈타인박사가 했던 것과 비슷한 실험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오반니 알디니라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외과의사였습니다.

 

그는 <동물전기>(Giovanni Aldini, 1794, <De Animali Electricitate>)라는 책을 썼고, 유명한 루이지 갈바니(Luigi Galvani)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갈바니는 1780년에 "동물 전기"(animal electricity)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정치풍자 카툰에 그려진 "전기로 살아난 시체". 그림 : Henry R. Robinson. 1836. (출처 : wikipedia)

 

<프랑켄슈타인>의 서문은, 괴물 탄생과 관련된 당대 과학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저명한 학자들의 얘기를 전하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괴물 탄생 사건과 어느 정도 밑받침이 되어주는 과학은 이야기의 재미와 흥미와 상상을 북돋우는 장치일 뿐이라고 저자는 이어서 쓰고 있습니다.

 

이 장치가 너무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바람에, 메리 셸리가 말하고자 했던 더 중요한 주제, 즉 과학에 대한 경계심, 인류애, 자연, 지식 자체에 대한 의구심 등이 그 장치 뒤로 가려지게 되었거나 은폐하는 데 사용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프랑켄슈타인박사가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과정과 프랑켄슈타인이 혼자 세상을 떠돌며 자연과 인간의 지식을 익히는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고향(제네바)을 떠나 잉골슈타트 대학이라는 최고의 대학으로 가서, 최신의 자연과학을 훌륭한 교수들로부터 직접 배우고 수많은 책을 읽고 온갖 기구들을 이용해 실험도 합니다.

 

반면 괴물은 혼자 거친 세상을 떠돌며 목숨을 걸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연과 평범한 농부들로부터 세계와 인간의 삶과 언어를 습득합니다.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818년 초판 첫 페이지. (출처 : wikipedia)

 

이름도 없는 괴물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혹은 숨어서, 자연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익혀가는 모습은 메리 셸리의 어린 시절과 겹쳐집니다. 그도 부모님의 서재에서 혼자 하나씩 하나씩 지식을 익혀 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겹침이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 속에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투영한 것에 불과할까요? 메리 셸리는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의구심과 비판들을 괴물의 입을 빌어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랑켄슈타인박사가 도망친 괴물을 끝까지 쫓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손을 벗어난 자연과학의 결과물이자 오점이고, 비판자이자 폭로자인 괴물을 프랑켄슈타인박사는 직접 없애려고 했던 걸까요? 아니면 자신, 즉 자연과학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요?

 

소설 <프랑켄슈타인, 혹은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학기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충격적이지만 우아하고 차분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메리 셸리가 가졌던 과학 문명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를 그린 미니어처.  Reginald Easton. 1857. (출처 : wikipedia)

 

 

참고자료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이미선 옮김. 2018. 황금가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김보영, 박상준, 심완선. 2019. 돌베개.

"Did a volcanic eruption in Indonesia really lead to the creation of Frankenstein?" Alan Marshall. 2020. 1. 24. The Conversation.

"Year without a summer" Chris Townsend. 2016. 10. 25. the Paris Review.

"Frankenstein: the real experiments that inspired the fictional science" Iwan Morus. 2018. 10. 26. The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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